64회 서울 코믹월드. 내가 처음 갔던 코믹이 6회-_-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간이 콩알만 해지는 숫자다. 지난 63회 서코는 일요일에 동인지 부스를 거의 절반으로 줄인다는 걸 모르고 갔었다. 그 결과 달랑 30분만에 동인지 똘랑 두 권을 들고 나오는 수모를 겪었으니... ㅅㅂㄻ 이런 굴욕은 처음이다. 살 게 없으면 구경할 거라도 많던가 구경할 게 없으면 어쩌자고 내 입장료 내놔. 64회 때는 반드시 만회하고 말겠어. 지글지글. 이런 마음으로 갔던 64회 서코였다.

설욕전은 다행히 성공했고, 학여울의 척박한 식환경에 눈물지으며-_- 캐빈과 코엑스까지 와서 기어이 닭을 먹고 입가심으로 가볍게 케익과 차. 식후 운동으로 코엑스 한 바퀴 걷고 옆 동네까지 거의 직선 코스로 내달리는 버스를 타고 돌아와서 째지는 기분으로 회지들을 감상한 뒤 잊기 전에 남기려고 이러고 있는 중이다.

일단 이번에는 강철이 셋, 나루토가 둘, 노다메도 둘, 슬램 하나. 꽤 흡족한 편이다. 한창 반지로 달릴 때는 스무 권 넘게도 샀었지만 지금은 내가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나 있으니 어쩔 수 없고.(요즘 코믹은 춘추전국시대 같지만) 회지들이 하나같이 그림도 내용도 괜찮아서 더더욱 만족했다. 그리고 오늘의 대미를 장식한 그것.

한국 슬레이어즈 팬픽사.



슬레이어즈
슬레이어즈
슬레이어즈
마법소녀 리나


이 책은 저번 코믹에서 매진된 줄 알고 잊고 있었는데 슬렐루야...! 이건 동인지가 아니라 제목 그대로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한국 슬레이어즈 팬픽의 역사와 흐름'을 정리한, 약 280페이지 두께의 위용을 자랑하는 책이다. 현재까지 자료가 남아있고 시기가 분명한 작품들만 연표에 실었는데도 1500편이 넘으니 정말이지 대단한 작업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실은 내가 유령질 하는 분이 내신 책이다. 이 분이 기획 및 참여하신 츄츄 문집과 앤솔로지도 샀었고, 온리전도 갔었다. 내가 말하는 '팬질을 하려면 거하게 한 판'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 중 한 분이기도... 줄줄이 드러나는 나의 스톼킹 내력이 부끄럽구나.ㅇ<-<

아쉽지만 나는 슬레 팬픽사의 한 줄기에 발가락이라도 담근 적이 없다. 팬픽은 쓰지도 못 했고 읽었던 팬픽도 아주 극소수다. 슬레이어즈, 마법-_-소녀 리나가 중학교 생활을 해까닥 뒤집어 놓긴 했어도 당시 PC통신은 꿈도 못 꿨었다. 또 해적판으로 슬슬 나오기 시작하던 Y물은 꽤 봤지만 동인질은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나에게도 순수한 시절이 있긴 했다-_- 나도 놀랍다.)

내게 슬레이어즈는 첫 버닝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너무 많아서 탈인 것도 같다. 지금도 있는 200장 넘어가는 애니 사진(!!)은 어쩔 것이며, 애니 화보집은 또 어떻고, 없는 용돈 그러모아 질러버린 원작 소설과, 당시 유행했던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은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과 주문과 주제가, 대만 짝퉁 OST와 포스터들, 종합편 녹화 테이프, 그리고 트라이에서 주옥같은 대사들은 모조리 받아적은 너덜너덜한 공책까지.

이것 뿐이면 시작도 안 했다. 내가 걔들 때문에 그림 그리게 됐다. 걔들이 누구긴 리나 가우리 아멜리아 제로스 제르가디스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제르가디스를 안 보고 그리려고 죽어라 연습한 게 시작이었다. 내가 그놈의 얼굴에 난 돌기 숫자 외우고 모양 외워서 그리려고 얼마나 죽을똥-_- 게다가 그놈의 강철 수세미 머리카락의 웨이브는 어찌나 어렵던지. 더 심하게 죽을 맛이었던 건 내 교과서였을 것이다. 맨날 낙서해대서. 그것도 어디 뒤지면 아직 있다.

생각해보면 팬픽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놀면서 간단한 개그 패러디나 상황 설정 등은 했었다. 요는 인생 최초로 버닝과 패러디를 알게 해준 것이 슬레이어즈랄까. 그러던 와중에 드래곤 라자에 빠져 허부적, 슬레는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가 왔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이번에는 인생 최초의 남남 커플링. 제로제르의 팬픽과 팬아트. 심봤다... 아니 신세계를 봤습니다.

처음에는 놀랐다고 해도 큰 거부감 없이 금방 받아들인 나도 나지만. 그만큼 그 팬픽과 팬아트의 설정들은 설득력이 있었다. 나중에는 리나제르도 좋아했다. 남은 사람 껴맞추기로 제르가디스가 아멜리아와 맺어지는 듯해서 그 둘의 커플링을 싫어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들끼리 잘 되길 바라는 게 가장 기본적인 동인 커플링 아닌가. 나는 제르가디스 다음으로 리나를 좋아했다.

이래저래 슬레이어즈는 첫단추 같은 작품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 판타지 소설계와 팬픽계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리고 슬레이어즈의 '파괴성'이 당시의 중고등학생에게 어떤 식으로 매력적이었는지를 설명한 부분에서는 이마를 딱 찍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완전히 내 얘기였고, 나만의 얘기도 아니었다. 명쾌한 정리.

그 외에도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오는 과정과 그에 따른 온라인의 변화 양상, 팬덤의 흥망성쇠 단계 등등 구구절절 공감한 부분이 많았다. 이런 식으로 책 전체에 걸쳐 어떤 큰 흐름이 보이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모르는 제목이 태반인 팬픽사를 술술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미친듯이 즐거워한 부분은 2장 표지의 '제로스와 제르가디스는 어쩌다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나?'였... 먼산. 그것 말고도 도적 소굴을 봤을 때와 식사를 앞에 뒀을 때의 각 캐릭터별 반응이라거나. 어느 각주에서 '필자는 이 작가분이 외전을 쓰겠다고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라고 쓰신 부분이라거나...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아무튼 한 개인이 자신의 소중한 팬질사를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슬레이어즈 팬픽사'를 만드신 분에게 감사의 인사 일창. 그리고 개인적으로 했던 팬질이 지금이라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되는 느낌을 가지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감사 이창. 슬레이어즈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어서 감사 삼창. 그런데 읽는 동안 찌릿찌릿해서 좀 힘들었으니 직접 감사글을 남기지는 않고 계속 유령으로 남을까 한다.(<-)

덧: 아이고 이 책이 나온 계기가 슬레이어즈 한국 방영 10주년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10년 전이란 말이지. 후후후 그래 10년-_- 난 어차피 98년 겨울에 트라이 재방부터 봤지만 어쨌든 10년이나 9년이나-_- 뭐 그렇게 따지면 원작은 20년 다 되어간다 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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