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30분, 한국이었다면 한밤중일 시간이나 까마귀 울음 소리-_-로 인해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 도대체 너네는 왜 남이 잘 자고 있는데 창가에 모여 앉아서 우는 거냐? 튀겨 먹을래도 못 먹는 쓸모 없는 놈들 같으니. 일본에 까마귀 많단 얘기는 들어봤어도 영국에 까마귀 있단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런던에 있는 동안 이놈들이 새벽마다 울어제끼는 바람에 아침 하나는 잘 챙겨 먹었음. 젠장.

드디어 고대하던 아침. 계란 후라이, 기름에 쩐 베이컨, 역시 기름에 쩐 소시지, 콩 요리, 식빵 두 쪽, 주스, 커피 혹은 영국식 우유 넣어 마시는 차... 꺅 고기다!! 아 이런 눈에서 땀이ㅜㅜ 고기야 어머니 고기예요! 이래서 내가 아침 식사만큼은 영국식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니까ㅜㅜ

아침 먹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서 침대에서 구르다가 창 쪽에 얼굴 놓고 스팀 쪼이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도 찌뿌드드한데 나가기 싫군... 이 따위 나른한 생각을 좀 해주었음. 그러나 어쨌든 날 밝으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단기 여행자의 처지, 궁시렁 거리면서 가방을 메고 나왔다. 하루 지하철 비용만 만원 정도 나가는 런던 물가인데 마침 빌리를 보는 이 날은 숙소에서 극장까지 지하철을 탈 필요가 없으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가기로 결정. 빅토리아 역에서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가깝길래 가보기로 했다.

사실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2004년에 유럽 여행 갔을 때도 갔던 곳이지만 내게 있어서 그 때의 그 공원이 지금의 이 공원이 아니게 되었으니. 여기가 바로 백조님이 계신다는 그 공원이 아닌감. 성지 순례다 와하하하! (<-)

공원 안에 있는 버킹엄 궁전으로 갔는데 역시 사람들 바글바글. 여름보다는 훨씬 없는 편이지만, 여기서만 사진을 세 번 찍어주고 한국인 여행자도 만났다. 호수(라기엔 지나치게 길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가면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사서 벤치에 앉아 텁 물었는데-┏ 이때서야 영국 음식에 대한 수많은 혹평들을 이해할 수 있었음. 어떻게 만들면 이런 평범한 샌드위치가 그렇게까지 맛이 없을 수가 있냐.-_-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빵은 푸석푸석하지 야채 쪼가리는 말라 비틀어졌지 참치는 비리고 소스는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되게 맛 없다. 내가 런던에 와서 학교 매점의 1200원 짜리 샌드위치를 그리워하게 되다니. 먼산. 아니 먼호수.

대충 입 속으로 밀어넣고 본격적으로 백조님을 찾기 시작했음. 그런데 그 긴 호수를 한바퀴 돌았는데도 백조라고는 단 한마리도 안 보이고 웬갖 잡새들만 깩깩 거리고 있었다. 설마 여기에 백조 없나; 싶어서 안내판을 봤더니 분명히 있다고 쓰여 있다. 백조 뿐 아니라 흑조도.(영어로 Black Swan이라고 되어 있었음)

계속 보기(사진 압박)

이상하네 하면서 다시 걸어가는데 바로 눈 앞에 흑조님이 노닐고 계시는 것 아닌가.OTL
아니 어디 계시다가 갑자기 나타나셨소 이런 깍쟁이.(..) 허둥지둥 사진을 찍었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흔들렸다. 이건 그나마 잘 나온 사진.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었더니 이번에는 저 반대 쪽에 백조님이OTL 줌 땡겨서 찍었으나 엄청나게 흔들려 버렸음. 좌절.
홀로 하얗고 고고하십니다. ㅜㅜ)/

먼 발치에서라도 영접-_-했으니 성지 순례는 이걸로 끝! 이러면서 슬슬 걸어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시간이 꽤 남아서 뭘 할까 하다가 일단 런던의 상징-_- 빅벤 쪽으로.
여기까지 오니 왼편에 런던 아이가 보인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안 타봤으니 한번 타볼까 하고 다리를 건넜음.
런던 아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관람차다. 최고점의 높이가 135m이고 각 차량이 꽤 큰데다 바닥과 뼈대를 제외하면 전부 유리로 되어있다고는 해도 30분 도는 주제에 무지 비싼 관람차.-_- 브리티쉬 에어웨이에서 만든 거라는데 타기 전에 공항에서 하듯 소지품 검사를 하더라.
표 끊고 탑승 시간 기다리면서 찍은 사진. 무슨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란 조명이 이뻐서...

런던 아이에서 본 야경들.
파란 건물이 퀸 엘리자베스 홀이라던데 뭔지는 모르겠;
채링 크로스역
빅벤과 국회 의사당, 앞 차량
템즈 강 남부

내가 탄 차량에는 커플 두 그룹과-_- 론니 플래닛을 끼고 혼자 여행 온 듯한 남자애, 나 이렇게 여섯 명이 있었다. 남자애가 사진을 부탁해서 찍어 줬더니 내 사진도 찍어 주겠대서 얼결에 찍고 말았음.; 04년 여름에 왔을 때는 하늘이 11시 넘도록 완벽히 까맣게 되질 않아서 강바람 맞으며 세 시간을 덜덜 떨면서 기다려서 본 야경인데 겨울에는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다니 좀 허탈했다. 이 때가 오후 6시도 안 되었단 말이다.-_- 나원참. 하여간 관람차에서 내려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 빅토리아 역에 도착. 원래는 저녁이라도 먹으려고 했다가 인터넷 카페를 발견하고 쓱 들어갔다. 한국에서 폐인은 런던에서도 폐인. 그리고 드디어, 빌리 엘리어트를 볼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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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잡상
제일 먼저 내가 이 뮤지컬에 대해 별로 관대하지 않다는 것부터 말해야겠다. 한마디로 기대에 매우 못 미쳤다. 영화를 좋아하니 당연히 버닝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이 어긋났달까.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원인을 몇 개 가려냈는데...

1. 뮤지컬 오리지널 스코어
저작권 문제도 있거니와 배우들이 노래를 불러야 하므로 전부 오리지널 곡이 쓰이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나는 영화의 배경음악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좀 실망했다. 더구나 오리지널 곡들이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어서 타격이 더 컸다. 글쎄... 다시 보거나 들으면 또 평가가 어떻게 갈릴지는 모르겠지만 한번에 콱 꽂히지는 않았다는 소리. 전날 레미제를 봐서 더더욱 비교가 되었을지도.

2. 언어의 장벽-_-
이건 뮤지컬 탓이 아니다. 전적으로 내 탓이지.-_- 줄거리야 영화랑 비슷하니 대강 파악할 수는 있는데 대사들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특히 빌리네 동네의 사투리랄지 속어랄지 말장난이랄지 그런 웃으라고 치는 대사들은 정말 못 알아먹겠더라. 상황을 보면 이거 웃긴 말이로군 하고 파악은 되지만 정확한 내용을 모르니... 이 뮤지컬의 매력 중 하나는 그런 대사들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실제로 관객들이 굉장히 좋아하며 웃어댐) 그것을 느낄 수 없으니 보는 재미가 반감될 수 밖에.

3. 소년소년소년
이게 바로 결정적이면서 좀 웃긴 원인 되겠다. 애들은 나의 수비범위가 아니며 따라서 빌리가 아무리 앞에서 폴짝폴짝 뛰어 다니며 노래를 불러봤자 나에게는 별 감흥이 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역시 내가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제이미 벨의 애어른스러운 얼굴과 성깔머리 있는 듯한 표정 때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달까. 가까운 자리에서 봤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자리가 1층 뒤쪽이어서 자잘한 표정은 안 보였으니.

안 좋은 말만 줄줄 늘어놨는데 그렇다고 돈이 아까웠다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정도는 볼만하고, 사실 매우 볼만했지만 버닝할 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 결론.

이 뮤지컬이 브로드웨이로 갈 거란 얘기를 봤는데 빌리 캐스팅 때문에 난항을 겪고 있다나. 그도 그럴게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2차 성징 직전의 반짝반짝한 소년들을 대거 공수하기가 어디 쉽겠는가.-_- 웨스트엔드 빌리들도 이미 캐스팅이 바뀌어서 내가 봤던 빌리는 새로 투입된 Leon Cooke 이란 소년이었다.

이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동반한 짤막한 주절거림.


무대 장치가 기술적으로 감탄스러운 것이 몇 있었는데 빌리네 부엌에서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빌리 방이 되는 것을 표현한 장치가 최고였다. 완전히 올라오면 빌리네 집 전경이 되고 빌리 방만 보여줄 때는 살짝 내려가고, 다른 배경이 나올 때는 완전히 내려가면 오케이.

윌킨슨 부인이 늘씬해지셨는데 그 반대로 딸인 데비는 통통해졌다. 이렇게 되니 그 문제의 "원한다면 내 **를 보여줄 수도 있어" 가 그다지 유혹적이지 않았음.orz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이쁜 또래 여자애가 꼬셔도 별 관심 없는 덜 자란 우리 빌리;' 를 보여주는 게 포인트라 생각해서 좀 그랬다.

영화는 광부들의 파업 문제를 은근슬쩍 다루는데 비해 뮤지컬은 좀 더 드러내놓고 비중있게 처리한다. 물론 유머가 쓰이는 비율도 높다. 발레 소녀들과 시위 진압 경찰들이 섞여서 노래하고 춤 추는 부분은 귀엽기까지 했음.

빌리가 마이클네 집에 갔다가 마이클이 여자 옷 입은 것을 보고 WHAT- THE- HELL- 하고 외치는데 매우 웃었심; 빌리 뮤지컬 보고 나니까 한동안 입에서 What the hell, Shit, Bastard, Piss off 가 떠나질 않더라.(알아먹은 게 주로 이런 것밖에 없었으니=_=) 하여간 이 장면 뒤엔가? 빌리와 마이클의 화려한 쇼타임이 이어진다. 옷들;과 함께 춤 추고 노래하고 참 발랄함.

시험을 못 보게 된 빌리가 추는 분노의 춤은 영화보다는 조금 약한 느낌.

반면에 아버지 앞에서 추는 춤은 영화와 표현이 전혀 다르면서도 굉장히 멋졌다! 영화에서는 마이클과 체육관에서 놀다가 아버지에게 들키고 나서 보란듯이 막춤;을 추는 장면인데 뮤지컬에서는 아버지가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춘다.(확실하지는 않음;) 빌리가 한 손으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춤을 추고 그 옆에 성인 빌리가 나타나 같은 춤을, 더 능숙하게 춘다. 빌리 아버지가 춤 추는 빌리에게서 미래의 모습을 보는 장면 되겠다. 그리고 나서 영화에서는 윌킨슨 선생님의 차에서 들었던 백조의 호수 음악에 맞춰 빌리와 미래의 빌리가 같이 춤을 춘다. 여기서 빌리가 날았다!! 와이어에 매달린 것일테지만, 아무튼 내 눈에는 빌리가 날았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성인 빌리의 손을 잡고 무대 저쪽에서 이쪽으로 날다가 나중에는 손을 놓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백조 음악이라서 더욱 환장했다고는 말 안하련다. 이 때의 난 백조 공연을 본지 갓 이틀 지난 따끈따끈한 감성의 소유자였단 말이삼-_-)

빌리 뮤지컬 최고의 장면을 말해보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저 장면을 꼽을테다. 흑흑.

합격 통지서 장면이 조금 바뀌었는데 편지를 들고 방으로 올라간 빌리가 조용히 내려와 쓰레기통에 편지를 구겨서 처박고-_- 있으려니 형이 위로를 해주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에 편지를 다시 꺼내 펴보곤 "이 망할 새끼야!!!!" 라고 외치면서 빌리에게 달겨듬. 한마디로 빌리가 가족들을 속인 거다. 나름대로 깜찍한 마무리.

빌리가 떠날 채비를 하고 서 있는 뒤쪽으로 협상에서 진 광부들이 노래를 부르며 탄광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겹치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마이클과 작별 인사를 하고 빌리가 진짜로 무대를 내려와 가운데 통로를 걸어서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우어 헤드윅 때와 같은 '통로석 조낸 부럽삼' 현상을 빌리에서도 보게 되다니.orz 게다가 커튼콜로 배우들이 다 등장하고 윌킨슨 부인이 빌리를 부르면 다시 그 통로를 달려와 무대 위로 합류한다. 커튼콜에 다들 춤을 추는데 참으로 상큼발랄했음.

정리해보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무겁게 다루는 파업 문제에도 불구하고 노래와 춤, 약간 과격한 듯한 유머로 인해 전체적으로 매우 발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거 썼더니 갑자기 이 야밤에 빌리 영화가 땡기누만. 으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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